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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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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로 산치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148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동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바티칸 궁전의 서명실 벽화, 《아테네 학당》, 《갈라테아의 승리》, 《시스티나의 성모》 등이 있다. 라파엘로는 건축에도 참여하여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을 맡았으며, 후대에는 고전적 규범으로 평가받으며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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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파엘로의 자화상 추정
1506년경의 자화상 추정, 우피치 미술관 소장
본명라파엘로 산티 (또는 산치오)
출생일1483년 3월 28일 또는 4월 6일
출생지우르비노, 우르비노 공국
사망일1520년 4월 6일 (향년 37세)
사망지로마, 교황령
안장 장소판테온, 로마
분야회화
건축
사조盛期르네상스
부모조반니 산티
마지아
주요 작품라파엘로 방
시스티나의 성모
아테네 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서명
기타 정보
다른 이름라파엘로 다 우르비노
라파엘 산치오 다 우르비노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 우르비나스
영향로마 교황 율리오 2세
로마 교황 레오 10세

2. 생애

이탈리아 마르케 지방의 우르비노에서 화가이자 궁정 시인이었던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났다.[7] 아버지에게서 초기 미술 교육을 받았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움브리아 화파의 거장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18]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화풍을 빠르게 습득하여 17세 무렵 이미 스승의 조수로서 중요한 작업을 맡았으며, 1501년에는 독립된 화가("마스터")로 인정받았다.[19] 초기에는 페루지노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종교화를 주로 제작했다.

1504년에는 예술의 중심지였던 피렌체로 이주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며 큰 영향을 받았다.[117] 특히 레오나르도의 명암법과 구도, 미켈란젤로의 인체 표현과 역동성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조화롭고 우아한 양식을 발전시켰다.[120][123] 이 시기에는 성모자상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33] 그는 바티칸 궁전의 방들을 장식하는 대규모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받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테네 학당》을 포함한 '라파엘로의 방' 연작을 완성했다.[35] 이 작업은 그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으며, 후임 교황 레오 10세 치하에서도 계속 중용되어 교황청 관련 미술 프로젝트 전반을 감독하는 중책을 맡았다.[38] 그는 회화뿐 아니라 건축에도 재능을 보여 도나토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작업에 참여했으며,[125] 로마 고대 유적 발굴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많은 제자를 거느린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1520년 4월 6일 성금요일에 3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84] 그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로마의 판테온에 안장되었다.[84]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걸작을 남긴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3대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 서양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1. 초기 생애 (1483년 ~ 1504년)

1483년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지방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는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 화가였던 조반니 산티였다. 당시 우르비노는 예술적으로 중요한 도시 국가 우르비노 공국[99]이었다.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콘도티에로(용병 대장)로 활약하며 교황 시스토 4세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고, 그의 후원 아래 우르비노 궁정은 높은 문화 수준, 특히 문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 페데리코 3세는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482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화가이자 시인이었으며, 페데리코 3세의 생애를 다룬 운문 연대기를 쓰고 궁정 연회의 가면극 대본과 장식도 담당했다. 그는 당시 최신 미술 경향이었던 북이탈리아 및 초기 플랑드르파 화가들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작은 규모의 궁정이었기에 조반니는 군주 가문과 비교적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8][100]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의 작품, 《두 천사에게 받쳐진 그리스도》(1490년경)


페데리코의 뒤를 이은 아들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는 예술과 음악으로 유명했던 만토바 군주의 딸 엘리사베타 곤자가와 결혼했고, 그들 치하에서도 궁정은 문학 중심지로 남았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라파엘로는 바사리가 언급했듯 세련된 예절과 사교술을 익혔다.[9][101] 우르비노 궁정 생활은 후에 발다사레 카스티글리오네가 『궁정론』에서 이상적인 인문주의 궁정의 모델로 묘사하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1504년 이후 우르비노를 떠났지만, 자주 방문하며 카스티글리오네, 피에트로 벰보, 베르나르도 도비치(훗날 모두 추기경)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평생 상류 사회와 쉽게 어울렸으나, 완전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며 라틴어 구사 능력은 불확실하다.[10][102]

1507년경 우르비노 공작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초상화. (우피치 미술관)


라파엘로의 어머니 마지아는 1491년 그가 8세 때 사망했고, 재혼했던 아버지 조반니마저 1494년 8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11세에 고아가 된 라파엘로의 후견인은 사제였던 친삼촌 바르톨로메오였으나, 그는 후에 계모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아버지를 "크게 도왔다"[11][103]고 한다. 10대 시절 그린 자화상 드로잉은 그의 조숙함을 보여준다.[12][104] 아버지의 공방은 계속 운영되었고, 라파엘로는 어린 나이에도 계모와 함께 공방 운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라파엘로가 10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자화상


우르비노에서 그는 이전 궁정 화가였던 파올로 우첼로(1475년 사망)와 인근 치타 디 카스텔로에서 활동했던 루카 시뇨렐리(1498년까지 체류)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13][105]

바사리는 조반니 산티가 라파엘로를 움브리아의 거장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제자로 보냈다고 기록했으나[14], 당시 라파엘로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8세)과 바사리 외의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다.[106] 대신 1495년부터 우르비노 궁정 화가였던 티모테오 비티에게서 교육받았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된다.[15][107]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라파엘로가 적어도 1500년경부터 페루지노의 조수로 활동했다는 데 동의한다.[18] 페루지노는 페루자피렌체 등지에 공방을 운영했다. 라파엘로 초기 작품에 나타난 페루지노의 영향은 매우 뚜렷하며, 하인리히 뵐플린은 "아마도 천재적인 다른 제자도 스승의 가르침을 라파엘로만큼 흡수한 적은 없을 것"[16][109]이라고 평했다. 바사리는 두 화가의 작품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기법(두꺼운 물감 사용, 특정 부위 바니시 사용 등)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17][111] 페루지노 작품 속 라파엘로의 작업 부분을 구별해낸다.

라파엘로는 1500년 12월(또는 1501년)에 "마에스트로(거장)", 즉 완전히 숙련된 화가로 인정받았다.[19] 기록상 첫 작품 의뢰는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산 니콜라 다 톨렌티노 성당을 위한 『바론치 제단화』(en:Baronci altarpiece)로, 아버지의 동료였던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와 함께 1500년에 주문받아 1501년에 완성했다. 현재는 일부 단편과 준비 드로잉만 남아 있다.[20][21][112]

이후 몇 년간 그는 치타 디 카스텔로와 페루자의 여러 교회를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페루지노 양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몬드 십자가형』(약 1502-03년, 내셔널 갤러리), 『오디 제단화』(또는 성모 대관식, 약 1502-04년, 바티칸 미술관), 그리고 이 시기 가장 세련된 제단화로 평가받는 『성모의 결혼』(1504년, 브레라 미술관) 등이 있다.[22][113] 이 시기 작품들은 페루지노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성모의 결혼』 등에서는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공간 처리와 신선함이 나타난다.

그는 또한 우르비노 궁정의 후원자들을 위해 『세 여신』(샹티이 콩데 미술관), 『기사의 꿈』(내셔널 갤러리),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루브르 박물관) 같은 작고 정교한 그림들도 다수 제작했다.[23][114] 이 그림들은 청순한 색채와 부드러운 매력, 음악적 리듬감을 특징으로 한다.

1502년에는 페루지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핀투리키오의 초청으로 시에나를 방문하여, 시에나 대성당의 피콜로미니 도서관 프레스코 연작의 디자인 작업을 도왔다.[24][115] 이는 라파엘로가 경력 초기부터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수요가 많았음을 보여준다.[25]

'''초기 주요 작품'''

''몬드 십자가형'', 1502-03년, 페루지노의 영향을 보여준다 (내셔널 갤러리)


''성모의 대관식'' (오디 제단화), 1502-04년 (바티칸 미술관)

2. 2. 피렌체 시대 (1504년 ~ 1508년)

1504년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로 이주했다.[117] 당시 우르비노 공작은 정의의 기수에게 보낸 1504년 10월자 추천서에서 라파엘로를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매우 총명하고 예의 바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청년"이라 칭하며 피렌체에서의 수련을 지지했다.[118] 라파엘로는 1508년까지 피렌체에 기반을 두었지만, 항상 그곳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며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오가며 활동했다.[117]

피렌체에서 라파엘로는 스승 페루지노의 화풍에서 점차 벗어나 당대 거장들의 기법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 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스푸마토) 및 인물 구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 1505년경 페루자 프레스코화에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영향이 감지되며,[120] 이 시기 그린 《도니 부처상》과 다수의 성모자상에서는 레오나르도의 영향, 특히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가 두드러진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기법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더욱 자연스럽고 섬세한 인물 및 감정 표현을 구현했다.[120] 그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구도를 따른 드로잉이나, 원작은 소실되었지만 모사본으로 전해지는 《레다와 백조》 드로잉을 남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라파엘로)》(1507년)의 우아한 콘트라포스토 자세는 《레다와 백조》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다.[119]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레다와 백조』를 라파엘로가 모사한 드로잉.
영국 왕실 소장품 소장.
레오나르도의 원본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화가에 의한 복제본이 몇 점 남아 있다.


또한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조형 감각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매장 (라파엘로)》(1507년)에서는 미켈란젤로 특유의 역동적인 인체 표현과 극적인 구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123] 미술사가 하인리히 벨프린은 이 작품의 오른쪽 무릎 꿇은 여인이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미켈란젤로)》(1507년경)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했다.[123] 하지만 라파엘로는 이러한 영향들을 자신만의 조화롭고 우아한 화풍으로 통합시켰다. 그의 작품은 선의 율동적인 아름다움, 인물의 고요하고 청순한 표현, 그리고 스승 페루지노로부터 물려받은 맑고 부드러운 색채 등 독자적인 특징을 일관되게 유지했다.[120]

이 시기 라파엘로의 주요 작품들은 그의 예술적 성장을 잘 보여준다. 페루지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안시데이의 성모》(1505년경),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은 《카네이션의 성모》(1506-1507년경)와 《목장의 성모》(1506년경),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흡수하며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한 《그리스도의 매장 (라파엘로)》(1507년)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라파엘로는 자신보다 7살 많은 미켈란젤로와는 다소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경쟁자로 여겼으며, 나중에 로마에서 명성을 얻은 젊은 라파엘로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121]

피렌체에서의 다채로운 경험과 예술적 성취는 라파엘로가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겨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끄는 거장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 3. 로마 시대 (1508년 ~ 1520년)

1508년 라파엘로는 로마로 이주하여 생애의 남은 기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새로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을 받았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을 맡고 있던 건축가이자 우르비노 근교 출신으로 라파엘로와 먼 친척 관계였던 도나토 브라만테의 추천 때문이었을 것이다.[33][125]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초청을 받고도 수개월 동안 로마에서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34][126] 라파엘로는 즉시 바티칸 궁전으로 가서 교황의 개인 서재가 될 공간의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받았다.[35] 이것은 그가 피렌체에서 단 한 점의 제단화만 그렸던 것에 비해 훨씬 크고 중요한 의뢰였다. 당시 서재의 여러 방에는 이미 다른 화가와 조수들이 작업 중이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율리우스 2세가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시절의 흔적, 특히 그의 기여와 문장을 지우려는 의도에 따라[36][128] 기존 그림 위에 덧칠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제작을 의뢰받은 상태였다.[37]

아테네 학당』(1509년 - 1510년)
바티칸 궁전 라파엘로의 방의 "서명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파르나소스 산(The Parnassus), 1511,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이 유명한 "Stanze" 또는 "라파엘로의 방" 중 처음으로 작업한 방은 현재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 특히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산』, 그리고 『성체 논쟁』은 로마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라파엘로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라파엘로는 그 후 페루지노(Perugino)나 시뇨렐리(Signorelli) 같은 다른 화가들을 대신하여 추가로 방들의 벽화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총 세 개의 방(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의 화재의 방)의 벽과 천장 작업을 완료했으며, 작업이 진행될수록 세부적인 실행은 그가 운영하던 대규모 공방의 숙련된 조수들에게 맡기는 비중이 커졌다. 1520년 라파엘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네 번째 방("콘스탄티누스의 방")은 그의 디자인 일부를 바탕으로 공방 제자들이 완성했다. 1513년 율리우스 2세의 사망은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았고, 후임 교황이자 메디치 가문 출신인 레오 10세는 라파엘로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의뢰를 계속했다.[38][129] 라파엘로의 친구 비비에나 추기경 역시 레오 10세의 오랜 조언자였다.

"서명의 방"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당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제작하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모델이 되었다.


라파엘로가 이 방들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바사리에 따르면, 브라만테가 라파엘로를 몰래 성당에 들여보내 1511년 완성된 천장화의 첫 부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131] 미켈란젤로 작품의 압도적인 힘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미술의 주요 화두가 되었는데, 라파엘로는 누구보다도 이 영향을 자신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성공적으로 흡수했다. 가장 명백한 예는 『아테네 학당』에서 헤라클레이토스로 묘사된 미켈란젤로의 초상화로, 이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시빌라와 이그누디(ignudi)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39][130] 이후 그림들의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유사한 영향이 보이지만, 라파엘로 고유의 스타일 발전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비난하며 라파엘로 사후에도 "그가 예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나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불평했지만,[40][132] 다른 기록들은 미켈란젤로가 좀 더 관대한 반응을 보였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라파엘로를 로마로 초대한 중요한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약 1512년)
내셔널 갤러리 소장.
라파엘로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작품 중 하나.


이 매우 크고 복잡한 구성의 프레스코화들은 르네상스 성기(High Renaissance)의 그랜드 매너(grand manner) 양식을 대표하며, 고대 이후 서양 고전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매우 이상화되어 묘사되었고, 구성은 치밀한 드로잉을 통해 계획되었지만, 그의 친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가 정의한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즉 "모든 기교를 숨겨 마치 아무런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무심함"을 달성했다.[41] 미술사학자 마이클 레비(Michael Levey)는 "라파엘로는 그의 인물들에게 유클리드의 확실성이 있는 우주에서 초인적인 명료함과 우아함을 부여한다"고 평했다.[42] 처음 두 방의 그림들은 거의 모두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지만, 후기 방들의 작품, 특히 극적인 장면을 담은 것들은 구상이나 공방에서의 실행 면에서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못하다는 평가도 있다.[43]

이 시기 라파엘로는 교황청 관련 작업 외에도 다른 중요한 의뢰들을 받았다. 유명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는 자신의 별장(현 빌라 파르네시나) 장식을 위해 벽화를 의뢰했고, 이때 제작된 것이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갈라테아의 승리』이다. 이곳에서 작업하던 중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와 교류하며 그의 채색 기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색채 기법의 변화는 1511년에서 1514년 사이에 제작된 바티칸 궁전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의 벽화들, 즉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서 나타난다. 특히 빛과 그림자를 덩어리감 있게 대비시키는 명암 효과는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력을 보여준다.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은 색채 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을 비롯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 초상화와 성모자상에서도 두드러진다. 한편 라파엘로는 건축 분야에도 관여하여, 1514년 동향 선배인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바티칸 궁전 '보르고의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벽화 장식(1514–1517)에도 참여했으며, 1515년부터는 로마의 고대 유적 발굴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브란코니오 델라퀼라 궁전, 현재 파괴됨. 라파엘로가 설계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이 무렵의 걸작으로 꼽히는 『시스티나의 성모』(드레스덴)에서는 점차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산타 체칠리아』(볼로냐)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키지 예배당 설계와 장식, 바티칸 궁전 로지아(Logge) 장식, 빌라 마다마 건축 등 수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많은 제자를 거느린 화려한 궁정 화가로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그리고 종교 개혁의 영향 속에서 그의 예술은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는 평가도 있다.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시나 궁의 천장화 『프시케 이야기』에서는 초기 작품의 감미로운 리듬감 대신 고대 조각의 영향을 다소 경직되게 반영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18년 작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서는 뛰어난 군상 처리 능력을 보여주며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 마지막 작품은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 미술관)이다. 천상의 신비로운 빛과 지상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조시키고, S자 형태의 역동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극적인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주의 양식을 넘어서 바로크 양식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걸작을 남긴 라파엘로는 서양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주의 미술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3. 주요 작품

로마 교황 레오 10세와 두 명의 추기경(1518년경). 우피치 미술관 소장. 배경의 추기경은 줄리오 데 메디치(후의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루이지 데 로시이다.


로마 시대에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전의 라파엘로의 방 프레스코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다른 중요한 작품들도 남겼다. 주요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의 초상화는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으로 꼽힌다. 또한 친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나 교황청 관계자들의 초상화, 외교적 목적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진 그림 등 다양한 인물화를 제작했다.[134] 부유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서는 그의 별장(빌라 파르네지나)에 『갈라테아의 승리』(1513년)와 같은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교회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예배당 장식에도 참여했다.

교황의 의뢰로 제작된 중요한 작품 중에는 시스티나 성당의 태피스트리 디자인인 『라파엘로의 카르톤』(1515년-1516년)이 있다. 성 바울로와 성 베드로의 생애를 다룬 이 연작 중 현존하는 7점은 영국 로열 컬렉션 소장으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35] 라파엘로는 또한 바티칸 궁전의 로지아(회랑) 디자인과 로마풍 그로테스크 양식의 벽화 작업도 담당했다.[136] 이 외에도 『성 체칠리아의 환희』(1516년-1517년)나 『시스티나의 성모』와 같은 중요한 제단화를 남겼으며, 그의 미완성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은 후기 라파엘로 화풍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37][138]

라파엘로는 바사리에 따르면 50명에 달하는 제자와 조수를 둔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으며, 이는 당대 최대 규모였다. 공방 출신 중 다수가 후에 유명 화가가 되었는데, 특히 줄리오 로마노와 잔프란체스코 펜니는 라파엘로 사후 공방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파엘로의 공방은 효율적인 운영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139][140][141][142][143][144][145][146]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 자화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판화이다.


1514년 도나토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1520년 사망하면서 그의 계획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147] 그는 로마에서 여러 중요한 건축물 설계에도 참여했다. 브란코니오 델라쿠이라 궁전은 화려한 파사드로 유명했으나 후에 철거되었고,[149]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키지 예배당을 설계했다.[150] 또한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후의 클레멘스 7세)를 위한 마다마 빌라 설계에 참여하여 이탈리아식 정원 발전에 기여했으며,[151] 자신이 살 줄리아 거리의 대규모 궁전 설계도 남겼다.[152]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 키지 예배당 내부.


1515년에는 로마 근교에서 출토되는 모든 고대 미술품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고대 유적의 보존과 기록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제안하는 등 문화유산 보호에도 관심을 보였다.[153]

3. 1. 회화

이탈리아 움브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시인이자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동향인인 T. 비테에게서 배웠고, 움브리아파의 지도자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1500년경, 17세의 라파엘로는 페루지노가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에 그린 벽화 중 우의상(寓意像) 제작에 조수로 참여했다. 이 시기 작품으로 알려진 《삼미신》(샹티이 콩데 미술관)과 《기사의 꿈》(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리듬감이 나타나며, 격정보다는 부드러운 매력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음악적인 감각은 《성 미카엘》과 《성 게오르기우스》(모두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나타나며 그의 예술 기조를 이룬다. 페루지아에서 활동하며 페루지노의 기법을 빠르게 습득하여, 《성모의 대관》(바티칸 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런던 내셔널 갤러리),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등은 스승의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공간 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서는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을 보여준다.

1504년 피렌체로 이주한 라파엘로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 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키아로스쿠로)을 배우며 페루지노의 영향에서 벗어나 피렌체파 화풍으로 발전했다. 《도니 부부 초상》이나 이 시기 다른 초상화들, 그리고 가장 많이 그린 성모자상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 구도에서 레오나르도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배 거장들의 기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화면 구성의 율동적인 조화, 인물의 고요한 태도, 청순한 용모 등에서 독자성을 확립했다.

1508년 로마로 이주한 라파엘로는 1509년부터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바티칸 궁전 내 스탄체(Stanze)의 서명실(Stanza della Segnatura) 벽화 제작에 착수했다.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 벽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세 가지 덕목》 등을 그려 그의 탁월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로마의 고대 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쓰는 한편, 완성 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율동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이고 격조 높은 걸작을 완성했다. 이 시기 교황 측근들로부터 계속 제작 의뢰를 받아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당시 유명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의 별장(파르네시나 빌라) 장식을 위한 벽화 의뢰도 이 무렵에 받았으며, 이때 제작된 《갈라테아의 승리》(1512년)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당시 이곳에서 작업하던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와 교류하며 그의 채색법을 배웠다. 이러한 색채 기법의 변화는 1511년에서 1514년 사이에 제작된 바티칸 궁전의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 벽화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 나타난다. 빛과 그늘을 양감 있게 대비시킨 명암 효과는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불어넣었다.

베네치아파적인 색채 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을 비롯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다사레 카스티요네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에서도 나타난다.

바티칸 프로젝트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지만, 라파엘로는 두 주요 후원자인 교황 율리우스 2세와 그의 후계자 레오 10세를 포함한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특히 《율리우스 2세의 초상》은 그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다른 초상화들은 친구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나 교황청 인물들을 그린 것이다. 다른 통치자들도 작품을 요청했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국왕에게는 교황으로부터 외교 선물로 두 점의 그림이 보내졌다.[51] 부유한 은행가이자 교황 재무관인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 《갈라테아의 승리》 외에도 그의 파르네시나 빌라,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교회 예배당,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장례 예배당 모자이크 등을 위한 장식용 프레스코화를 디자인했다. 빌라 마다마 장식 일부도 디자인했으며, 이 작업들은 그의 공방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가장 중요한 교황 위촉 작품 중 하나는 라파엘의 카르통 시리즈(1515-1516)이다. 이는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제작을 위한 밑그림으로, 성 바울과 성 베드로의 생애를 다룬 10개의 카툰(대형 밑그림)이며, 이 중 7개가 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툰은 브뤼셀로 보내져 피에르 판 아엘스트(Pieter van Aelst)의 공방에서 태피스트리로 직조되었다. 라파엘로는 아마도 1520년 사망하기 전에 완성된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보았을 것이다.[52][135] 그는 또한 바티칸 궁전의 로지아(한쪽 면이 안뜰로 열린 길고 좁은 복도)를 디자인하고 로마식 그로테스크 양식으로 장식했다.[53][136]

《기적의 고기잡이》, 1515년 작,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 제작을 위한 7점의 남아있는 라파엘의 카르통 중 하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라파엘로는 《성 세실리아의 황홀경》(1516-1517, 볼로냐 국립 회화관)과 《시스티나 마돈나》(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를 포함하여 여러 중요한 제단화도 제작했다. 《산시스토의 성모》(시스티나 마돈나)는 이 무렵의 걸작으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산타 체칠리아》(성 세실리아의 황홀경)에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많은 제자를 거느린 화려한 궁정 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 개혁 운동을 계기로 점차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시나 궁전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이전의 감미로운 리듬이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다소 거칠게 반영하여 채색된 조각상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하게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 미술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작업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 스파시모(시칠리아의 고뇌)》(1517년, 프라도 미술관)와 함께 그의 예술이 말년에 매너리즘보다는 바로크 양식에 가까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54][137] 천상의 신비로운 빛과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키고,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인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 양식을 해체하며 바로크 양식의 시작을 예고한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걸작을 남긴 라파엘로는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여겨졌다.

라파엘로는 여러 작품(예: 《핑크의 마돈나》)을 나무판에 그렸지만, 캔버스(예: 《시스티나 마돈나》)도 사용했으며, 아마인유호두유 같은 건성유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팔레트는 풍부했고, 당시 구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안료, 즉 울트라마린, 납-주석-황색, 카민, 주홍, 매더 레이크, 녹청, 황토색 안료 등을 사용했다. 몇몇 그림(예: 《안시데이 마돈나》)에서는 희귀한 브라질우드 레이크, 금속 분말 , 그리고 덜 알려진 금속 분말 비스무트까지 사용했다.[55][56]

=== 드로잉 ===

라파엘로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가진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작품 구성을 계획하는 데 드로잉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작품 구상을 시작할 때 바닥에 자신의 드로잉들을 많이 펼쳐놓고, 여기저기서 인물들을 빌려와 "빠르게" 스케치를 하곤 했다.[66] 스탄체 서명실의 《성체의 논의》를 위한 40개가 넘는 스케치가 남아 있으며, 원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총 400장이 넘는 그의 드로잉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67] 그는 여러 드로잉을 사용하여 포즈와 구성을 다듬었는데, 남아 있는 다양한 버전의 수를 보면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드로잉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후 한 작가는 "발명력이 풍부했던 라파엘 자신은 항상 이야기를 보여주는 네 가지 또는 여섯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곤 했는데, 각각 다른 점이 있었고, 모두 우아하고 잘 만들어졌다."라고 썼다.[68] 미술사학자 존 셔먼(John Shearman)은 라파엘의 예술이 "생산에서 연구 개발로의 자원 이동"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69]

최종 구성이 완성되면 종종 확대된 실물 크기의 카툰(밑그림)이 제작되었고, 바늘로 구멍을 뚫어 그을음 주머니로 두드리는 방식("pouncing")으로 표면에 점선을 남겨 그림의 윤곽선을 옮겼다. 그는 종이와 회반죽 모두에 "눈에 보이지 않는 스타일러스"(금속으로 선을 새겨 압흔만 남기고 자국은 남기지 않는 도구)를 특히 많이 사용했다. 이는 《아테네 학당》 벽과 많은 드로잉 원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70] 태피스트리 디자인으로 사용된 "라파엘의 카르통"은 완전한 템페라 기법으로 채색되어 직조공들에게 보내졌다.

후기 공방에서 제작된 작품의 경우, 드로잉이 완성된 그림보다 더 매력적인 경우도 있다.[71] 대부분의 라파엘 드로잉은 매우 정밀하다. 윤곽선만 드러난 초기 스케치조차 신중하게 그려졌고, 후기 작업 드로잉은 종종 음영과 때로는 흰색 하이라이트가 더해져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의 스케치처럼 자유롭고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거의 항상 미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그는 금속펜(날카로운 은이나 다른 금속 조각으로 그리는 도구)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마지막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이었지만, 붉은색 분필(적색 석고)이나 검은색 분필과 같은 더 자유로운 재료도 훌륭하게 활용했다.[72] 말년에는 준비 드로잉에 여성 모델을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남성 제자("garzoni")가 남녀 모두의 인체 연구 모델을 했다.)[73]

=== 공방 ===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50명에 달하는 제자와 조수를 거느린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으며, 이들 중 다수가 후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이는 바로크 시대 이전의 올드 마스터가 운영한 공방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기술 수준 또한 뛰어났다. 라파엘로의 공방에는 로마 외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화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일종의 하청 공방처럼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화 작품 자체 외에 공방 내 역할 분담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공방에서 제작된 특정 작품을 어떤 화가가 담당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139]

라파엘로 공방 출신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라파엘로 사망 당시 21세였던 로마 출신의 줄리오 로마노와 피렌체에서 이미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던 잔프란체스코 펜니이다. 이 두 사람은 라파엘로의 많은 유품(드로잉 등)을 물려받았으며, 라파엘로 사후 잠시나마 공방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로마노와 달리 펜니는 이후 경력 대부분을 로마노와 동등하거나 그 이하의 협력자로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화가로서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다.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던 페리노 델 바가나, 바사리에 따르면 바티칸 궁전 회랑의 건축 자재 운반인에서 화가로 전향했다는 폴리도로 다 카라바조도 후에 유명 화가가 되었다. 다 카라바조의 동료였던 마투리노 다 피렌체(Maturino da Firenze)는 페니처럼 공동 제작자의 명성에 가려진 화가이다. 조반니 다 우디네는 라파엘로 공방 시절에도 독립적인 작업을 맡았으며, 특히 화려한 스투코 장식과 프레스코 벽화 주변의 그로테스크 장식을 담당했다.[140]

라파엘로 사후, 그의 공방에 모였던 화가들은 대부분 흩어졌고, 1527년 로마 약탈 때 목숨을 잃은 화가도 있다.[141] 그러나 흩어진 라파엘로 공방 출신 화가들을 통해 이탈리아 전역과 여러 외국에 라파엘로의 회화 양식이 전파되었다.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매우 협조적이고 효율적인 공방을 운영했으며, 후원자 및 조수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고 기록하며, 항상 후원자 및 조수들과 갈등을 빚었던 미켈란젤로와 대조된다고 언급했다.[142] 펜니나 로마노와 같은 제자들은 뛰어난 회화 기술을 가지고 있어, 때로는 작품에서 제자가 작업한 부분과 라파엘로 자신이 작업한 부분을 구별하기 어렵다.[143] 그러나 라파엘로 후기 작품의 많은 프레스코 벽화와 유화는 디자인 구성 자체가 뛰어나, 실제 제작자가 누구인지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초상화는 보존 상태가 좋다면 세부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144]

그 외 라파엘로 공방 출신으로 알려진 예술가로는 화가 라파엘리노 델 콜레(Raffaellino del Colle), 안드레아 사바티니(Andrea Sabbatini), 바르톨로메오 다 바냐카발로(Bartolommeo Ramenghi), 펠레그리노 아레투지(Pellegrino Aretusi), 빈첸초 타마니(Vincenzo Tamagni), 바티스타 도시(Battista Dossi), 톰마소 빈치도르(Tommaso Vincidor), 티모테오 비티(Timoteo Viti) 등이 있으며, 조각가이자 건축가로는 로마노의 의형제 로렌체토(Lorenzetto) 등이 있다.[145] 플랑드르 화가 베르나르트 판 오를레이가 라파엘로의 제자였다는 설도 있으며, 잔프란체스코 펜니의 동생 루카 펜니(Luca Penni)도 라파엘로 공방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46]

3. 2. 건축



1514년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 책임자였던 도나토 브라만테가 사망하자, 라파엘로가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대성당의 건축가로 임명되었다.[147] 하지만 라파엘로가 152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참여했던 계획의 대부분은 변경되거나 폐기되었고, 결국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이 때문에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관련된 라파엘로의 업적은 몇 점의 드로잉으로만 남아있다.[44] 그의 설계는 최종안보다 훨씬 어두운 분위기의 교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라파엘로 사후 건축 책임자가 된 안토니오 다 상갈로 젊은이는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선 모습이 "골목길 같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디자인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 '헬리오도로스의 방'에 그린 프레스코화 『신전에서 추방되는 헬리오도로스』 배경 속 신전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44][147]

라파엘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 외에도 여러 건물을 설계하며 짧은 기간 동안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는 로마의 도로를 정비하고 웅장한 궁전들로 도시를 채우려 했으며, 라파엘로는 교황청 주변 인물들을 위해 건물을 설계했다.[45][148]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 교황 레오 10세의 수석 서기관 겸 집사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브란코니오 델라퀼라를 위한 브란코니오 델라퀼라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건물 정면이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3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그림이 그려진 판이, 중간 층에는 많은 조각상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산 피에트로 광장을 만들면서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 정면과 안뜰의 모습이 담긴 드로잉만 남아있다.[46][149]

또한 라파엘로는 유명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 안에 있는 키지 예배당을 설계하고 내부를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다만 키지의 별장인 빌라 파르네시나의 주요 설계는 라파엘로가 맡지 않았다.[150] 레오 10세의 주치의를 위해 지어진 야코포 다 브레시아 궁전도 라파엘로가 설계했으며, 이 건물은 라파엘로 자신이 살았던 브라만테의 궁전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되었다. 이 궁전은 1930년대에 위치가 옮겨졌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다.[47][150]

1518년부터 짓기 시작한 마다마 빌라는 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추기경 율리오 데 메디치를 위한 호화로운 언덕 위 휴양지였다. 라파엘로는 이곳에 이탈리아식 정원의 시초가 된 계단식 정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라파엘로가 사망하고 후원자였던 추기경이 다른 장소를 선호하게 되면서 원래 계획대로 완공되지는 못했다. 최종 설계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젊은이가 마무리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마다마 빌라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세련된 빌라 설계로 평가받으며 이후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유명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상세한 도면을 남긴 유일한 동시대 로마 건물이기도 하다.[48][151]

라파엘로는 로마의 레골라 지역 비아 줄리아 거리에 자신이 살 대규모 궁전을 지을 계획도 세웠다. 그는 이를 위해 티베르 강 근처 땅을 사들였으며, 남아있는 설계도를 보면 모든 건물 정면에 거대한 기둥(자이언트 오더)을 세운 웅장한 모습으로, "개인 저택으로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고 평가된다.[49][152]

건축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라파엘로는 마르코 파비오 칼보에게 고대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저서 『건축론』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달라고 요청했고, 1514년경 번역본을 받았다. 라파엘로가 직접 주석을 단 이 번역본은 현재 뮌헨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515년 라파엘로는 로마와 그 주변에서 발굴되는 모든 고대 미술품에 대한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고대 유적의 파괴를 멈추고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하는 긴 편지를 보냈다. 레오 10세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 등에 고대 건축물을 재활용할 생각도 있었지만, 라파엘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문을 기록하고 조각 작품을 보존하는 데는 동의했다. 이는 라파엘로가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 문화유산 보존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153]

4. 예술적 특징 및 영향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고전주의 예술을 완성한 3대 거장으로 꼽힌다.[116] 그의 예술은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으나, 곧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초기 작품인 《삼미신》, 《기사의 꿈》 등에서는 움브리아파 특유의 맑은 색채와 부드러운 조화, 서정성이 돋보인다. 페루지노 공방 시절 그린 페루지아 어음교환소 벽화의 우의상(寓意像)이나, 스승의 화풍과 매우 유사한 《성모대관》, 《그리스도의 책형》,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 등에서도 그의 재능이 드러나지만, 공간 처리나 섬세한 표현에서는 스승을 넘어서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1504년 피렌체로 이주한 라파엘로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구도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스푸마토)을 흡수하며 페루지노의 영향에서 벗어나 피렌체파 양식으로 나아갔다. 특히 레오나르도의 영향은 《도니 부처상》 같은 초상화나, 《목장의 성모》와 같은 성모자상에서 보이는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와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116][120]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부드러운 인체 표현과 인물 간의 감정 교류를 더욱 자연스럽게 묘사했다.[120] 또한, 미켈란젤로의 영향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매장》(1507년)에서는 그의 역동적인 인체 표현과 선의 움직임을 참고하였다.[123] 그러나 라파엘로는 단순히 선배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화면의 조화로운 구성, 인물의 평온한 자태, 청순한 용모 등에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쳐 보였다.

1508년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긴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며 바티칸 궁전의 스탄체(Stanze, 방들) 벽화 작업에 착수하여 예술적 전성기를 맞이했다. 서명실(Stanza della Segnatura)에 그린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세 가지 덕목》 등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기 라파엘로는 로마의 고대 유적과 고전 예술 연구에 힘쓰는 한편, 미켈란젤로가 작업 중이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조형 감각을 배워 더욱 세련되고 율동적인 구도와 고전적인 격조를 갖춘 걸작들을 완성했다. 또한,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채색법을 받아들여,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등이 포함된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 벽화에서는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구현했다. 이러한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색채 표현은 《율리오 2세상》, 《베일을 쓴 여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등 초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라파엘로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1514년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자가 되었고, 키지 예배당 설계와 장식, 빌라 마다마 건축 등에도 참여했다. 1515년부터는 고대 유적 발굴 감독관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수많은 주문을 소화하는 인기 화가가 되면서,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때때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산 시스토의 성모》나 《성녀 체칠리아》에서 이러한 경향이 감지되며,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시나 궁전의 천장화 《프시케 이야기》에서는 초기 작품의 감미로운 조화 대신 고대 조각의 영향을 다소 경직되게 반영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1518년)에서는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탁월하게 묘사하며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은 천상의 신비로운 광채와 지상의 소란스러운 현실을 S자형의 역동적인 구도로 대비시키며 고전주의 양식을 넘어서는 바로크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파르네시나 빌라의 <삼미신> 습작.


라파엘로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소묘가 중 한 명으로도 인정받는다. 그는 작품 구상을 위해 수많은 습작 드로잉을 남겼으며,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방대한 양의 드로잉을 바닥에 펼쳐놓고 인물이나 구도를 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빠르게 구상했다고 한다.[154] 현재 400점 이상의 드로잉이 남아 있으며, 이는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작품을 준비했는지를 보여준다.[155] 라파엘로는 하나의 구성을 확정하기 위해 여러 버전의 드로잉을 그렸는데, 이는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이탈리아 미술 이론가 루도비코 돌체는 라파엘로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항상 4~6가지의 다른 구성안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구성안이 모두 아름답고 훌륭했다고 기록했다.[156] 최종 구성이 정해지면 실제 작품 크기의 밑그림(카르톤)을 제작하고, 바늘 구멍을 통해 윤곽선을 옮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특히 라파엘로는 종이나 회반죽에 드로잉을 할 때 첨필을 많이 사용하여 윤곽선을 긁힌 자국처럼 표시했는데, 이는 《아테네 학당》 표면에서도 확인된다.[158] 그의 드로잉은 초기 구상 단계의 나체 습작부터 최종 완성작에 가까운 정밀한 드로잉까지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다루기 어려운 은촉을 즐겨 사용했으며, 말년에는 실제 여성 모델을 고용하여 드로잉을 제작한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했다.[160][161]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라파엘로가 남긴 수많은 걸작과 그의 예술적 성취는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조화, 균형,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했으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주의 미술의 중요한 규범으로 여겨지며 후대 화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5. 판화

라파엘로는 직접 판화를 제작하지 않았지만,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와 협업하여 라파엘로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판화를 제작했다.[74][162] 이 협업은 16세기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판화 중 많은 부분을 만들어냈고, 복제판화의 부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74] 라파엘로가 판화에 보인 관심은 당대의 다른 거장들에게서는 드문 경우였는데, 동시대 예술가 중에서는 라이몬디와 협력했지만 라파엘로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티치아노 정도만이 비슷한 관심을 보였다.[74][162]

라파엘로는 라이몬디가 판화로 옮길 수 있도록 디자인 드로잉을 제공했으며, 라이몬디는 이를 바탕으로 조각판화를 제작했다.[163] 이러한 준비 드로잉 중 상당수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75][163] 총 약 50점의 판화가 제작되었는데,[74] 일부는 라파엘로의 기존 회화 작품을 복제한 것이었지만, 상당수는 판화 제작을 위해 라파엘로가 독창적으로 구상한 디자인이었다.[74][163]

이 협업을 통해 제작된 독창적인 판화 중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는 「루크레티아」,[167] 「파리스의 심판」, 그리고 거의 동일한 두 가지 버전으로 조각된 「무고한 자들의 학살」이 있다.[75][164] 또한 라파엘로의 회화 작품을 판화로 옮긴 것 중에서는 「파르나소스」(원본 프레스코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76]와 파르네시나 빌라의 프레스코화 「갈라테아」를 바탕으로 한 판화가 잘 알려져 있다.[76][164]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라파엘로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판화 「무고한 자들의 학살」. 첫 번째 상태, '전나무 없음'.


이탈리아 외부에서는 라이몬디와 다른 판화가들이 제작한 이러한 복제 판화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라파엘로의 예술을 접하는 주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76][164] 바사리가 "일 바비에라"라고 언급한 바비에로 카로치는 라파엘로가 재정 관리를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조수로,[77] 라파엘로 사후 판화 제작에 사용된 구리 원판 대부분을 확보하여 판화 출판업자로서 성공을 거두었다.[78][166]

6. 후대의 평가

''시스티나의 성모'' (1512)


라파엘로는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동시대 예술 양식에 미친 영향력은 미켈란젤로보다 적었다. 그의 사후 시작된 마니에리즘과 이후의 바로크 양식은 라파엘로의 특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예술을 이끌었다.[85] 미술사학자 발터 프리들랜더(Walter Friedländer)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고전 예술, 즉 고전 르네상스는 쇠퇴했다"고 평가했다.[86] 그럼에도 그는 마니에리즘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모델로 여겨졌다.

16세기 중반에는 라파엘로가 재능이 뛰어나고 예술의 모든 규칙을 충족하는 이상적인 균형 잡힌 화가라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남성 누드 드로잉이라는 특정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였지만, 위대한 예술가에게 필수적인 우아함과 자제력이 부족한 불균형적인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로도비코 돌체(Lodovico Dolce)나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와 같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미켈란젤로가 마니에리즘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따르지 않았다.[87]

바사리 역시 자신의 저서 ''화가들의 삶'' 두 번째 판에서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떤 면에서는 해로웠다는 견해를 추가하며, 비록 미켈란젤로를 영웅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88]

라파엘로의 구성 능력은 꾸준히 칭찬받고 연구되었으며, 미술 아카데미 교육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시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로, 그의 완벽한 기교와 균형 감각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장르의 계층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역사화의 이상적인 모델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는 그의 ''강의''에서 라파엘로의 "단순하고, 엄숙하며, 위엄 있는 품위"를 칭찬하고, 특히 그의 프레스코화(라파엘로 카툰 포함)를 들어 "그는 일반적으로 최고의 화가들 중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라파엘로만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가진 것들은 최고의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레이놀즈는 16세기의 평가를 반복하며 라파엘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특별한 사람의 탁월함은 그의 인물의 적절성, 아름다움, 위엄, 그의 구성의 사려 깊은 고안, 정확한 드로잉, 순수한 취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개념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능숙하게 적용하는 데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이 자연에 대한 자신의 관찰에 미켈란젤로의 에너지와 고대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결합한 판단에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중 누가 1위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예술의 더 높은 자질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결합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면, 라파엘로가 1위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롱기누스에 따르면, 숭고함은 인간의 구성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탁월함이며, 다른 모든 아름다움의 부재를 충분히 보상하고 다른 모든 결점을 속죄한다면, 미켈란젤로가 우선권을 주장해야 합니다.[89]


레이놀즈는 라파엘로의 패널 그림에는 상대적으로 덜 열광적이었지만, 이 그림들의 감상적인 분위기는 19세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은 1862년에 태어난 세대로서 라파엘로의 성모 그림에 대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의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훨씬 많은 복제물을 통해 이것들과 친숙해져 왔다"고 술회했다.[90]

독일에서는 19세기 나자레파 운동과 뒤셀도르프 화파의 종교 미술에 라파엘로가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영국에서는 프리라파엘리트 형제단이 그의 영향력(및 조슈아 레이놀즈와 같은 추종자들의 영향)에 명시적으로 반발하며, 라파엘로 이전의 양식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준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라파엘로를 기점으로 예술의 초점이 '진실'과 '사상'에서 '아름다움'과 '실행(기교)'으로 옮겨가면서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비판했다.[91]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라파엘로의 인기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다소 밀리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부게로(Bouguereau)와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예술가들의 라파엘로풍 작품에 대한 반발 때문일 수도 있다.[92]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은 1952년에 라파엘로를 고전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거장이라고 칭했지만,[93] 레오폴드와 헬렌 에틀링거(Leopold and Helen Ettlinger)는 20세기 라파엘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지적하며 그의 인기가 다소 낮아졌음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든 위대한 르네상스 거장 중에서 라파엘로의 영향이 가장 지속적이다"라고 결론지었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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